이태원의 오후, 도시가 들려주는 세계여행의 속삭임

일요일 오후, 해방촌으로 향하는 언덕길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마트24 편의점 앞. 테라스에 앉아 캔맥주를 홀짝이는 외국인들 사이로 나도 자리를 잡았다. 서울 한복판에서 마시는 캔맥주인데, 마치 유럽의 어느 골목길에서 여행자로서 휴식을 취하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주변에서는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가 뒤섞인 웅성거림. 이태원이 내게 속삭였다. "여기서는 네가 여행자야. 잠시 일상을 내려놓고 여행자의 마음으로 걸어봐."
세계의 문화가 공존하는 곳, 이태원

이태원은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위치한 국제적인 분위기의 동네다. 1950년대 주한미군 기지촌으로 시작해 외국인들의 터전이 되면서 다양한 문화가 뒤섞인 독특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해방촌, 경리단길, 녹사평, 한남동으로 이어지는 이 일대는 각기 다른 매력을 품고 있다. 특히 이태원은 타 지역과 달리 급격한 언덕과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특징적인데, 이런 지형 때문에 걷다 보면 매번 색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이태원 나들이, 이렇게 준비했어요

4월 중순, 봄바람이 살랑이는 주말 오후에 이태원을 찾았다. 가벼운 자켓 하나와 편한 운동화는 필수다. 이태원의 언덕길과 계단이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다. 삼각지역에서 출발해 해방촌으로 올라가는 코스를 택했는데, 지하철 6호선 삼각지역 12번 출구로 나와 녹사평대로를 따라 걸었다.
여행 동선 : 삼각지역 → 해방촌 언덕길 → 후암동전망대 → 보광로59길 → 이태원로 27가길 → 이태원역
이번 여행은 혼자서 천천히 걷는 도보 여행이라 어떤 장소에서든 마음이 끌리면 멈춰 서서 충분히 감상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거리는 도보로 30분 이내에 이동 가능하지만, 언덕길이 많아 체력 소모가 생각보다 크니 중간중간 쉬어가는 것을 추천한다.
이태원의 숨은 보석들
후암동전망대

해방촌을 지나 후암동으로 이어지는 길에 위치한 이 전망대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서울의 숨은 뷰포인트다. 남산타워와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으로, 해 질 무렵이면 황금빛으로 물드는 도시 전경이 장관이다. 주소: 서울 용산구 소월로 168
보광로59길 골목

이태원의 메인 거리에서 벗어난 이 골목은 아기자기한 카페와 음식점, 빈티지 숍들이 모여있다. 특히 오래된 건물을 개조한 가게들이 많아 레트로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는 인스타그램에 올라오지 않은 '진짜 이태원'을 만날 수 있다.
이태원의 맛, 그리고 술
해가 저물어갈 무렵, 출출해진 배를 채우기 위해 이태원로 27가길에 위치한 '와이키키비치포차'에 들어갔다. 이름에서 느껴지듯 하와이안 분위기와 일본 이자카야 감성이 섞인 독특한 곳이었다.

생맥주와 유린기 가라아게를 주문했다. 안주는 조금 소박했지만, 맥주 한 잔에 5,000원, 안주가 9,000원으로 이태원 물가를 생각하면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특히 유린기 소스의 새콤달콤한 맛과 바삭한 닭고기의 조화가 맥주와 잘 어울렸다.

와이키키비치라는 컨셉에 맞게 메뉴판을 가져다줄 때 꽃다발 목걸이를 들고와서 걸어준다. 내심 목걸이를 걸 수 있겠거니 기대하면서 들어갔는 데 혼자라 그런지 목걸이는 걸어주지 않았다. 혼자라서 뻘쭘할까봐 오히려 배려로 걸어주지않았으려나. 사람들은 처음 걸어준 꽃목걸이를 화장실갈 때에도 소중하게 걸고 다니는 모습이 귀여웠다.
편의점 테라스에서 만난 세계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해방촌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이마트24 편의점 앞이었다. 테라스에 자리를 잡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는데, 앞에 앉아있던 외국인 두 명이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섰다. 테이블에 아이스커피 한 잔이 남아있길래 조심스럽게 물었다.
"Is it not yours?"
내 입에서 나온 영어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사실 이 짧은 문장을 내뱉기 전에 속으로 열 번은 연습했던 것 같다. 너무 오랜만에 사용하는 영어라 긴장됐다.
"It's not ours. It was already here when we sat down," 그들이 대답했다.
정확하게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예전에 해외여행 다닐 때처럼 뉘앙스로 의도를 파악했다. 이태원에서는 이런 작은 순간들이 나를 다시 여행자로 만들어주었다.

테라스에 앉아 캔맥주를 홀짝이며 바라본 이태원의 거리는 활기가 넘쳤다. 다양한 언어가 뒤섞인 대화 소리, 음식 냄새,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까지... 모든 것이 마치 외국의 어느 거리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당신의 이태원 여행을 위한 꿀팁
예산
- 대중교통: 지하철 왕복 2,500원
- 식음료: 와이키키비치포차에서 맥주 2잔과 안주 1개로 약 19,000원
- 간식 및 편의점: 약 8,000원
총 약 30,000원 내외로 반나절 여행 가능
교통
-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 녹사평역, 삼각지역이 모두 도보 이동 가능한 거리에 있음
- 버스: 용산구 일대를 순환하는 지선버스도 다수 있음
- 택시: 늦은 시간에는 콜택시 앱(카카오 택시 등) 이용 권장, 심야에는 호출이 어려울 수 있음

주의할 점
- '땡깡'(흥정)이 통하지 않는 곳이 많으니 가격 흥정은 삼가는 것이 좋다
- 주말 저녁시간대(7-10시)에는 인기 레스토랑 대기 시간이 길어질 수 있음
- 언덕길이 많아 편한 신발 필수!
- 일부 외국인 전용 클럽이나 바는 내국인 입장을 제한하는 경우도 있음
이방인이 되어보는 시간

해가 저물어 가는 이태원의 골목길을 걸으며 문득 깨달았다. 여행은 꼭 멀리 떠나야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때로는 익숙한 도시 속에서 낯선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여행자의 설렘을 느낄 수 있다. 이태원은 서울 속의 작은 세계여행이다.

편의점 테라스에서 캔맥주를 마시던 그 순간, 나는 분명 내 도시에 있었지만 동시에 여행자였다. 여러분도 일상에 지쳤다면, 반나절만 시간을 내서 이태원의 골목길을 걸어보길 권한다. 그저 걷고, 보고, 듣고, 맛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특별한 계획 없이,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걸어보자. 이태원은 언제나 당신을 여행자로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어서와, 이태원은 처음이지?"라고 말하는 것 같은 이 거리의 다정한 초대를 받아들여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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